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고 선정을 베풀기도 한다. 1388년에 드디어 이성계의 추천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으로 중앙 관계에 복귀한 정도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화려한 시기를 펼치게 된다. 일생일대의 최고 후원자인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된 국가와 정통적 유교정치를 제도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하는데 진력했다. 이와 같은 점을 바탕으로 여기서는 삼봉의 조선조의 제도정치의 기틀이었던 성리학을 기본으로 그의 민본,위민정치및 군주제와 재상정치, 그리고 이념정책의 근간이었던 배불정책을 살펴보는데 그목적을 두도록 하겠다.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
세종대왕의 생애
조선 4대 국왕 (1397 ~ 1450)
태종의 3남으로 재위기간 32년
1412년 충녕대군으로 임명
1418년 왕세자로 책봉
동년 8월에 태종의 양위로 즉위
※ 학구적인 세종의 심각한 건강
과도한 육식과 대외활동기피
과도한 연구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 수면부족
당뇨합병증과 비뇨기질환,
사상에 바탕을 둔 위민사상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찍이 조선의 건국이념을 세운 바 있는 정도전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며 군주의 하늘”이라고 했고, 이 사상은 조광조와 이율곡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적 ‘민’사상은 봉건적 ‘사민관’에 바탕을 두었고, ‘士’와
완비를 통한 적극적인 국가의 지도력을 강조하였다.
주례이념의 중시는 도덕적 사회 수급을 목표로 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다양한 제도를 지향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인간의 도덕적 생활이 제도적 개혁을 통하여 달성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③ 정도전의 교육사상
정도전과 길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고려 후기에 이룩한 사살과 문학의 최고 수준을 서로 다른 방행으로 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미친 영향에서는 상보적인 작용을 했다.
고려 후기 동안에 거듭된 역사의 격동은 철저하고도 과감한 개척정신을 요청했다. 그래서 사상과 문학에서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면서 조선 왕조의 사회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유교 이념에 토대를 둔 정책은 특히 세종, 세조에 의하여 주도되어, 성균관과 집현전 등을 통해서 수준 높은 근세 문화를 창조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일부 사대부들은 왕조의 개창을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
조광조 趙光祖
1482(성종 13) ~ 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한성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오사화로 화를 입고 회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
정도전 등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며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주장한 급진 혁명파 세력들이 고려왕조의 기본 틀 내에서의 온건적인 개량을 주장한 이색, 정몽주 등의 온건파 세력들을 제거하며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자였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며 결국 조선이란 새로운 왕조가